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코코넛의 눈코입귀

[코코넛의 눈코입귀] 오늘, 섹스하고 싶은 당신을 위한 게이 섹스 안내서

by 행성인 2025. 11. 25.

코코넛(행성인 HIV/AIDS인권팀)

 

 

게이 커뮤니티에서 성적 권리와 만족감을 동시에 챙기는 섹스를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성적 권리'라고 부르기엔 나의 것을 빼앗기지 않는 것, 세이프섹스, 인권과 같이 재미없고 원론적인 원칙을 말하는 느낌이 들고, '만족감'은 점잖은 장소에서 말하기 어려운 것, 은밀한 욕망과 페티시, 혹은 동등한 위치에서 하는 섹스가 아니더라도 하룻밤을 뜨겁게 보낼 수 있는 즐거움 등을 떠올리게 해서 둘은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게이 커뮤니티에서 성적 권리를 이야기하면 재미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본인이 잘 안 팔리니까 그런 애기만 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을 것도 같다. 서로를 탐색하는 과정, ‘팔고’ ‘팔리는과정, 섹스를 하기 위해 준비하고 현장에 임하고 떠나는 과정, 그리고 이후까지도 성적 권리 담론에서 다룬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 올해 중반부터 지금까지 몇 달에 걸쳐 진행한 행성인 HIV/AIDS인권팀(이하 '에이즈팀') 메시지 만들기 프로젝트가 퀴어 커뮤니티, 행성인,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유독 의미있는 이유다. 프로젝트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걸 예쁘게 정리해서 글로 풀어내는 게 쉽지는 않다. 그래도 이야기를 시작하면, 처음 프로젝트가 기획되어 나가는 걸 보고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에이즈팀에서 에이즈 얘기를 좀 더 하면 좋겠다는 욕심 비슷한 것이다. 제작년 이맘때 에이즈팀에 합류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다함께 술을 마시다가 내가 에이즈팀에서 에이즈 얘기는 안 하고 퀴어섹스 얘기만 한다고, 팀 이름을 퀴어섹스팀으로 바꾸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뭔가 그때와 비슷한 마음 같았다. 물론 진심으로 에이즈팀의 방향이나 프로젝트에 대해 실망했다는 뜻은 아니고, 에이즈팀에서 HIV/AIDS 이슈에만 집중한 무언가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로젝트 초기에 기획을 맡겠다고 하고 회의에 참가했을 때는, 한국에서 HIV/AIDS  역사가 40년이나 되었다는 메시지를 핵심으로 넣자고 했다. 감염인의 성적 권리와, HIV/AIDS 를 포함한 성병, 혹은 바이러스와 감염에 대한 게이 커뮤니티에 대한 기조를 만들어 전반적인 메세지를 대중에게 나눠주는 팔찌 같은 굿즈에도 넣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눠주는 굿즈를 만들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큰 아쉬움으로 남아서, 다음에 이런 프로젝트를 다시 하면 어떻게 우겨서든 굿즈를 제작할 예산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야겠다고 혼자 생각중이다.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종로와 이태원의 게이 업소에 부착할 포스터를 제작하기로 했다. 메시지는 섹스를 하기 위해 서로를 탐색하고, 준비하고, 섹스 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역동에 대해 탐구하고, 일련의 과정으로부터 성적 권리를 생각해보자는 문구들로 이루어졌다. 메시지의 분량을 조금 더 줄이고 HIV/AIDS 이슈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기획 과정 전반에 참여하고 프로젝트가 발전되어서 꼴을 갖추어 가는 과정을 보면서 이런 기획도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애정을 가지고 참여 의사를 밝힌 프로젝트이니 끝까지 욕심과 애정을 유지하면서 참여했던 것 같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몇 차례 팀원들과 메시지를 구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섹스에 있어서 정말 기본적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에티켓마저 게이 커뮤니티를 향한 메시지로 낼 필요가 있다는 의견들을 듣고 놀라기도 했다. 섹스할 때 서로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고 동의를 구하거나, 섹스 파트너나 애인을 넘어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지키는 것, 섹스 후의 매너 및 성병을 대하는 자세 등은 너무 당연해서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게이 커뮤니티에 기초적인 예의마저 잘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다. 일반적으로는 성교육 시간에 HIV나 에이즈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는 내용은 고사하고 동성 간의 성관계조차도 다루지 않는다. 기본적인 항목들을 알아도 지키지 않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사실 때문에라도 프로젝트가 의미있겠다고 생각했다.

 

12월 1일 세계 HIV/AIDS의 날, HIV감염인 인권의 날에 게시할 '오늘, 섹스하고 싶은 당신을 위한 게이/MSM 섹스 안내서' 카드뉴스 첫 장 이미지

 

 

많은 논의와 토론, 타협, 삭제, 첨가, 그리고 의견 청취 끝에 완성된 포스터에는 사실 그렇게 심각하거나 심오한 말들이 적힌 것은 아니다. 거절할 때는 예의있게, 서로의 상태와 원하는 것에 대한 소통하고 섹스 후 성병검사, 그리고 HIV에 감염되었더라도 삶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 괜찮다는, 성교육 시간에 배울 만한 것이나 기초적인 사회화를 거친 사람이라면 알 법한 내용들이 담겼다

 

성적 권리는 재미없는 것, 원론적인 것,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탐색하고 스킨십부터 깊은 관계를 하는 과정에, 이후 성병 검사 전반에 이뤄지는 과정에 걸쳐 있이다. 너무나도 완식인 상대를 만날 때 내가 원하지 않거나 상대의 무리한 요구에 거절 의사를 표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나의 안전과 즐거움은 어떻게 챙길 수 있는지 생각할 수 있다. 내가 원하지 않는 행위에 대해 분명히 거절 의사를 밝히는 것도 성적 권리겠지만, 반대로 내가 원하는 상대와 만족스러운 섹스를 위해 양보하고 경계를 넘어서는 일도 성적 권리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섹스를 하는 과정에서 정답이랄 것은 없다. 성적 권리를 지키는 섹스는 외적으로 어떻게 보여지는 섹스를 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성관계 전반에 걸쳐 어떤 결정과 역할을 하는지, 그 과정과 판단에 마음과 감정이 어떤지를 살피는 일이 아닐까.

 

질병관리청에서 2025년 9월 배포한 HIV/AIDS 예방 캠페인 이미지

 

 

그런 의미에서, 성적 권리를 지키는 섹스가 반드시 여러 공식 기관 등에서 강조하는 세이프 섹스와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그럴 수도 없겠지만 말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 콘돔을 사용해서 섹스를 하는 것, 혹은 잦은 성파트너 변경을 하지 않는 것, ‘익명, 즉석 파트너와의 성접촉을 하지 않는 것이 본인의 선택이라면 그 또한 성적 권리이고, 당연히 존중받고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내가 자신의 만족 때문에 콘돔 없는 섹스를 즐긴다면, 혹은 어플이나 찜방, 클럽 같은 곳에서 여러 파트너와 섹스를 한다면, 그것 또한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온전한 성적 권리로 마찬가지로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게 세이프하지 않은 섹스를 즐기는 것을 성병에 감염되기 쉬운 위험하고 책임 없는 결정으로 낙인찍는다면 그것은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성적 권리에도, 심지어 성병 예방에도 그닥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미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섹스 라이프를 더더욱 음지화할 뿐이다. 프렙 복용을 강조한다고 해서 한 달에 몇만 원의 금액이 모든 사람들에게 부담 없는 금액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형태의 섹스 라이프에 낙인을 찍지 않으며 구체적인 사정을 살피는 일이, 어떤 형태의 섹스이든 간에 그 안에서 성병 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 의료적, 사회적 변화가 생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프로젝트는 다 알법한 얘기를 잘 보이는 곳에 게시하면서 다시 한번 의식하기를 바라고, 이런 논의를 해보자고 제안한다. 세이프 섹스를 강조하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게이 커뮤니티에 말하기 위한 첫 번째 단추인 것이다.

 

종로와 이태원에 술마시고 놀러 온 사람들이 이 포스터를 얼마나 많이 볼지는 모르겠다. 보고도 관심 없을 수 있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수도 있고, 아예 읽지 않을 수도 있고, 그렇게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는 신념처럼, 포스터에 시선이 꽂히는 열 명 중 한두 명이라도 어떤 종류의 관심이라도 가지면서, 5초라도 좋으니 우리가 무슨 메시지를 말하고 싶은지 잠깐 읽고 갔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다. 운이 좋으면 우리의 포스터가 트위터를 타고 소소하게 공유될 수도 있고,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를 찾아보거나 QR코드로 링크를 심어 놓은 HIV/AIDS 인권행동 알의 '아카히브'를 방문할 수도 있다. 그렇게만 되어도 이 포스터는 만들어진 목적을 충분히 다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프로젝트의 결과물과 논의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감염인이나 성병에 대한 낙인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해 더 논의하고, 대중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기회도 만들어보고, 원래 욕심대로 HIV/AIDS 이슈에 집중한 프로젝트도 반드시 진행하고 싶다. 우선은 행성인에서 디자인을 맡아 작업하는 이안 활동가가 포스터를 예쁘게 만들어 주었으니 종로나 이태원을 넘어서 다른 단체나 업소에도 포스터가 게시되었으면 한다. 세이프 섹스’보다도 즐거운 섹스를 말하는 이유를 앞으로도 계속 게이를 포함한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말할 수 있으면 좋겠고, HIV/AIDS에 대한 게이 커뮤니티의 낙인과 공포를 정면으로 저격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싶다. 그리고 반드시, 다음에는 나눠줄 수 있는 굿즈를 제작해서 이런 메시지를 새길 수 있으면 한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아직 종로와 이태원에 프로젝트 포스터를 게시하기 전인데, 12월 초에 업소들에 게시될 이 포스터가 그 시작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