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
행성인에서 상임활동가를 하기 전, 포천 교동마을에서 작가들과 함께 기록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탄강홍수조절용댐건설로 인해 마을이 수몰지역으로 지정된 곳이었어요. 그곳에 들어가 수몰 전의 마을 풍경을 담아내는 일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어느 노부부의 집 한채를 이주지역에 새로 지어드리는 프로젝트로 진화하게 됐었어요. 설치미술가, 화가, 사진가, 식물연구자, 조각가 등 다양한 작가들이 생전 해본 적 없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두 계절을 꼬박, 일주일에 3~4일씩 머물면서 집을 지었었어요. 바닥을 다지고 구조물을 세우고 흙을 바르고 지붕을 얹고 담을 쌓고 벽지와 장판을 까는, 말그대로 정말로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방식으로 과정을 작품으로 담았지요. 이주 첫 날, 노부부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가능할 것 같지 않던 프로젝트의 성공을 체감하게 해주었어요. 참 뿌듯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13년의 세월이 지났어요.
지난 토요일, 프로젝트 이후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으니, 거의 10년만에 마을을 방문했어요. 당시 프로젝트 매니저였던 작가분이 이번에 마을에서 진행한 새 프로젝트의 개관행사에 초대를 받았어요. 제 기억에서 어렴풋이 존재하던 공간은 어느덧 세월의 때를 많이 입었더라고요. 우리를 자식처럼 대해주었던 노부부도 기억보다 한참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낯설고 익숙한 풍경 사이로 마을 주민들의 희노애락이 엿보이기도 했어요. 오랜만에 만난 저마다의 인사가 재밌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름을 잘못 기억하고, 누군가는 머리스타일을 다르게 알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전혀 새로운 기억을 끄집어내고 또 다른 이는 생전 처음 본다는 얼굴로 인사를 받습니다. 기억을 더듬거리다 보니 어쩌면 관계란 나와 내 기억과의 사투가 아닌가 싶어집니다. 반갑다가도 뻘쭘하고 낯설다가도 따뜻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습니다.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싶어 애틋해도, 돌아본 풍경에 아쉬움은 없어요. 집에 돌아오니 그새 몇 시간 전의 마을이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교동마을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는 꽤 다른 모습이라 마치 다른 세계의 나를 훔쳐보고 온 것만 같아요. ‘지금’도 어느 시간에 그렇게 지나가겠죠. 좀더 소중하게 대해줘야겠어요.
오소리

10월말을 휴가로 보내고 있습니다. 휴가의 시작과 함께 대만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이번이 첫 대만 방문이기도 했는데요. 타이완 퍼레이드 기간에 맞춰 행성인 회원들, 다른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해서 더욱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한동안 이 소중한 추억을 원동력 삼아 힘차게 살아갈 것 같아요. 앞으로도 더 많은 회원분들과 더 많은 추억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안
짧은 가을 하루하루를 바쁘게 즐겨보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추석 연휴에는 퀴어동지들과도 원가족들과도 안부를 나누었고, 월말에는 할로윈 대신 대만행을 결심하여 타이완 프라이드와 트랜스마치를 무사히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한국 활동가분들과의 우연한 만남에 더욱 들뜨고 즐거웠습니다. 제 해외여행은 이번이 두 번째예요. 아직도 공항 출입국이나 현지 교통편 이용이 낯설고 어렵지만, 도착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니 그 긴장이 다 잊히는 듯 했어요. 특히 퀴어로서 대만에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나 편안하고 자유로웠어요. 타이베이를 가득 채우는 너무 많은 무지개, 너무 많은 퀴어패싱과 커플들, 너무 많은 LGBT+ 공간들! 솔직한 심정으로는, 조금 더 머물고 싶었을 정도였지요.
저는 평소 일이나 활동을 할 때 늦을까봐, 잘못될까봐, 무슨 일이 생길까 저도 모르게 긴장을 많이 해요. 또 최근 주변에서 감사하게도 일감을 많이 주셔서 출국 전날까지 빠듯하게 몰아치듯 일하다가 홀가분하게 떠나왔지요. 뭔가 보상심리일까요, 일할 때처럼 꽉찬 일정표로 움직이고 싶지는 않았어요. 기간도 약간 여유롭게 잡은 김에 숙소 주변을 구불구불 걸어다니면서 구석구석 구경하고, 갑자기 궁금해서 공원과 박물관을 찾아가보고 잘 모르겠는데 먹어볼까 말까 고민되면 일단 시도해보고, 씨에씨에(고마워요)와 하오츠(맛있어요)를 남발하며 다녔습니다. 얼레벌레 멋대로 돌아다니니 정말 설레고 즐거웠어요. 꼭 이러고 싶었던 것만 같아요. 바로 다음날부터 늘 그랬던 것처럼 또 시간표 속에 바쁘게 일하겠지만, 4박 5일의 시간 덕분에 너무 휩쓸리지만은 않고 가끔은, 조금은 제 뜻대로 하루를 움직일 힘과 길을 얻은 것 같아요.
여러분은 가깝든 멀든, 짧든 길든 여행을 가게 된다면 어떻게 다니시나요? 자세히 계획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편인가요, 즉흥과 우연을 기대하며 여유롭게 움직이는 편인가요? 그리고 여행을 통해 무엇을 얻으시나요?
남웅
요즘은 소소하게 주변을 정리하면서 지낸다. 한때 책장에 책이 가득 꽂혀 있는 것에 익숙했다면 지금은 10여 년 넘게 꽂힌 채로 먼지만 쌓인 것들부터 처분 중이다. 옷도 신발도 정리하고 화분들도 미뤄뒀던 분갈이를 하고 시든건 과감하게 굿바이 한다. 오래된 향수를 치우고 핸드폰을 바꾸고 선반을 새로 구했다. 그밖의 것들도 눈에 띄면 정리대상이 된다. 팔자가 바뀔 때면 주변 환경에 변화가 오는게 신호라고 하는데, 정리하면서는 이렇게 변화를 맞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생년의 10월부터는 흐름이 달라질거라는 무당들의 점사를 유튜브로 보면서 괜히 의식적으로 정리하는 거 같지만 그게 아니어도 돌아보면 좀 너저분했다. 미련을 갖지 않으면서도 떠나보내는 만큼 새로 찾아오는 것들이 있고, 그런 중에도 계속해서 쥐고 있어야 하는 건 뭘까를 헤아린다.
연말이 되면 활동을 갈무리하면서 한해를 돌아보겠지만, 올해는 여느때처럼 흔들리면서도 유난스럽다는 느낌이 강하다. 도파민에 절어 평온을 찾을 겨를이 없지만 자제할 마음은 별로 없어 보이고(그 중 하나가 발꼬랑내 맡듯 계속 보게 되는 중남 밈 같은거), 보는 건 많은데 보고 싶은건 잘 못보는 것 같고. 그와중에 일상의 잡무들을 놓지 않으려니 어느 순간에는 가용 에너지의 잔량을 확인하게 된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관계의 체력도 예전같지 않은 건 그저 나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제 천천히 생각해야 한다.
내년은 가볍게 몇 개의 목표와 바람을 세워야겠다. 한동안은 짧게 도피하고 돌아올 수 있는 공간과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호림
2025 인구주택총조사 ‘응답가구’에 선정된 분 계신가요?
아마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접하셨겠지만, 이번 조사에 아주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동성 부부도 서로의 관계를 배우자로 응답할 수 있게 되었고, ‘비혼동거(함께 사는 연인)’이라는 선택지도 새롭게 생겼습니다. 당연히, 서로의 성별이 같은 경우에도 ‘비혼동거’로 응답할 수 있고요.
그동안 함께 사는 사람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응답할 수 없었던 많은 동성부부, 성소수자 가족들도 이제 자신의 가족 형태를 정확하게 응답할 수 있는 큰 변화입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 통계를 통해 성소수자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변화는 성소수자 시민들의 권리를 위한 법과 제도의 변화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이번에 ‘응답가구’로 선정이 되어서, 우편함에 꽂혀있는 조사 참여 안내문을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 보았어요. ‘모두의결혼’ 명의로 동성부부와 성소수자 가족을 위한 참여 안내문을 내보낸 후에 저도 노트북을 켜고 조사에 응했습니다. 저와 애인의 관계를 동거인이 아니라 ‘배우자’로 입력하고 모든 응답을 완료하고 나니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이번엔 통계의 숫자 하나이지만 머지 않은 미래엔 서로의 가족관계등록부에도 ‘배우자’로 등록할 수 있겠지요.
이번 인구주택총조사의 변화에 진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국가데이터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참여입니다. 더 많은 동성부부, 성소수자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 상태를 정확하게 응답할 때 우리가 원하는 변화도 더 빠르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분이라도 더 이 소식을 접하고 조사에 응답하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번 상임활동가의 사정에서도 인구주택총조사 소식을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응답가구라면, 정확한 응답을! 그리고 더 많은 동성부부와 성소수자 가족들이 이 소식을 접할 수 있도록 주변에 널리 알려주세요! 함께 변화를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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