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 (행성인 HIV/AIDS인권팀)
확진받고 쓴 두 편의 웹진 글 이후, 이어서 쓸 주제가 다소 불미스러워 미리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누가 읽을지 모르지만 쓰는 나는 즐겁고, 즐거움은 면역력에 좋으니까.
2년 만의 대만 방문이었다. 직장을 퇴사하고 처음 방문했던 경험이 너무 좋아서 그해 타이페이 프라이드 참여차 행성인 회원들과 또 다녀왔다. 물론 즐거웠지만 세 시간씩 줄서서 클럽에 들어가야하는 엄청난 인파에 질린 탓에 ‘매해 대만에 가되, 프라이드 기간은 다신 없다’라는 다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다짐은 깨라고 있는 거다.
탄핵 정국이 끝날 무렵 집회 뒷풀이에서 행성인 회원들과 10월 프라이드 기간에 맞춰서 대만에 가자는 결의를 해버렸다. 여행에 큰 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가고싶은 몇몇 클럽에 가고 ‘퍼레이드 참여’ 말고는 어떠한 계획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찌저찌 발길이 이끌고 인연에 끌려 이 글을 남긴다. 미리 얘기하면 이번 원고에 2025 타이페이 프라이드 내용은 없다.(기대는 깨지기 마련이다)
1.
대만에 도착하니 비가 제법 내렸다. 비가 많이 내리는 기간인 건 알고 있었지만, 지난 방문동안 비가 내린 적은 거의 없어서 스스로 날씨 요정임을 자부했는데 요정은 아닌가보다. 숙소가 위치한 시먼딩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무지개 횡단보도 사진을 찍고나니 딱히 일정이랄 게 없었다. 사원 구경과 야시장에 간다는 친구들에게 몸을 맡겼다. 보안궁이라는 곳이었는데 관광지로 유명한 사원은 아닌 것 같다. 찾아보니 사원에 모신 분이 건강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한다. 네이버에서 기도하는 방법을 검색해 주위 활동가 친구들과 감염인 커뮤니티 회원들의 건강을 위해 기도했다.
야시장에 갔다가 후발대와 만나 시먼 홍러우 뒤에 있는 가게에서 술을 마셨다. 맥주에 취할리 없는 술꾼들은 편의점에서 한병에 만원 가까이 하는 소주를(한국소주 그거. 심지어 냉장고 밖에 있었다)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전까지 꽤 피곤했는데 고국의 술에 취하니 살짝 기운이 나면서 클럽에 가고싶어졌다. 같이 술마시는 친구들을 꼬셨지만 행성인 동지들 중에 클럽을 즐기는 친구같은 건 없고, 유일하게 함께 놀던 동료도 최근 연애를 시작하셔서 조신을 장착했다. 이대로 취하기엔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거리를 보니 아직 인파가 많이 몰리지 않았기에, 유일하게 대기 없이 클럽에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번뜩 일요일에 가려고 체크한 H클럽이 떠올랐다. 이 곳은 무려 지난 방문 당시 샤워타올 파티를 한대서 오픈 시간 9시에 맞춰서 갔더니 3시간을 기다렸고, 빡친 마음으로 들어갔다가 기다린 시간만큼 다크룸에서 굴러다니며 본전을 뽑은 곳이다. 결심이 서자마자 나설 준비를 했다. 첫날부터 클럽에 가는 성실한 감자는 “딱 10명이랑 하고 와” 라는 응원을 받았다. 그 말이 발단이 될 줄은 몰랐지.
클럽은 숙소에서 멀지 않았다. 줄이 길까봐 걱정했는데 클럽 앞은 텅 비어있었다.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들어가고 한층 아래 콩나물 시루보다 빼곡한 사람들 머리가 있다. 이정도로 많기를 바란건 아니었다. 이 클럽은 오늘부터 4일동안, 상탈/언더웨어/훈도시/샤워타올이라는 드레스코드를 정해뒀다. 입장 팔찌를 사서 들어가자마자 상의를 벗어서 가방과 함께 사물함에 넣었다.
두 잔의 프리 드링크 쿠폰 하나를 써서 한 입에 털어넣고 바로 다크룸으로 들어갔다. 고작 두번째 방문이지만 느낌 아니까. 마치 이 곳을 잘 알고 익숙한 듯 두꺼운 암막 커튼을 열고 들어갔다. 2년 전 처음으로 다크룸의 즐거움을 알려준 이곳은 여전했다. 가끔 누군가 들어올때 커튼 틈으로 클럽 조명이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완전한 암전이 유지된다. 정보가 제한되는 만큼 재고 따지는 것이 누그러지고, 이 곳에 들어와있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문턱이 통과된다. 그렇지만 현장에서는 탐색과 동의 구하기, 승낙과 거절이 날카롭고 빠르게 진행되기도 한다.
들어간지 1분만에 첫 상대를 만나서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한 친구가 대만어로 탑/바텀이 뭔지 알려줬지만 써본적은 없다. 모두가 “Top? Bottom? Where are you from?” 외에는 말하지 않았다.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고 일사천리로 다음 스텝이 이어졌다. 물론 처음 만난 상대부터 삽입을 할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지만.

격무가 끝나니 숨이 차고 술도 깬다. 한잔 더 마시기 위해 옷을 주섬주섬 챙겨입고 밖으로 나가 프리 드링크 티켓을 찾았다. 밴딩이 있는 운동복 바지를 입고 올걸 잠깐 후회했다. 남자에 잠깐 정신이 팔린동안 불안하게 무릎에 걸려있던 바지에서 티켓이 사라져버렸다. 현금을 가져오려면 락커를 열고, 동전을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이 콩나물시루 인파를 뚫고 나가는 데만 최소 5분 넘게 걸릴 것이 확실하다. 프리 드링크는 무슨…이성적인 판단보다는 즐거움을 따르기로 했다. 몸 맡기는 거 잘하는 편이다.
아까 10명 딱 만나라고 했던가. 7명까지는 또렷하게 센 기억이 나는데 그 뒤는 흐릿하다. 새삼 다크룸에서만큼은 식의 경계가 흐려진다는 걸 남겨둔다. 3시가 넘어가면서 사람들이 차츰 빠지는게 보일때쯤 나도 숙소에 돌아왔다.
2.
둘째날은 저녁에 트랜스 마치를 갔다가 전날처럼 뒷풀이를 하고 클럽에 갔는데 예상했던 대로 3시간을 기다렸다. 케이팝과 EDM을 트는 방이 나뉘어 있었는데, 기다림도 힘들었고 다음날 퍼레이드가 있다. 일찍 귀가하려고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2시간 동안 케이팝 트는 곳에서 뛰어놀다가 EDM 트는 곳에서 뒤에서 나를 안은 낯선 남자의 손에 이끌려 클럽 화장실에 와 있었다(암전).
셋째날은 대망의 퍼레이드… 비도 오고 긴 코스에 녹초가 되어 숙소에 오자마자 잠들었다가 얼떨결에 현지에서 어플로 매칭된 친구(알고보니 이 친구도 활동가였다)가 단체 사무실에서 뒷풀이를 하고 있다길래 거기에 합류해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숙소에 돌아왔다. 우연히 만난 친구들과 대만의 퀴어운동, HIV/AIDS관련 활동 등 예상치 못한 고급 대화를 나누는 호사를 누렸다. 그 중 하나가 타이페이에 있는 게이 찜방에 대한 정보였다. 마침 다음날 일정도 없는 김에 한번 가볼 마음이 생겼고(이러려고 계획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친구에게 주소를 물어 구글맵에 저장했다.
3.
다음날 거의 점심 쯤 눈을 뜨자마자 간단히 해장을하고 어제 들은 찜방으로 갔다. 숙소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거리다. 구글맵에 실시간 인파를 추정해주는 기능이 있다. 보통 클럽 줄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때 종종 체크하는데, 무려 이 찜방도 체크가 가능했다(구글 일 잘하네). 평상시의 두배가 넘는 인파라고 해서 조급해졌다. 마음이 무색하게 버스를 잘못 타고 엉뚱한 동네에서 10분 넘게 기다려 간신히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도착한 곳은 찜방이 있을거라고 예상하기 어려운 한적한 동네였다. 무려 간판도 있다. 경험상 한국 찜방들은 보통 지하에 있는데 여기는 지상 4층이다. 계단을 올라가니 3층 쯤부터 줄이 있었다. 일요일 대낮에도 섹스하고싶은 부지런한 게이들은 한 곳으로 모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띵동 소리가 들릴때마다 줄이 줄어들었고, 문앞에 설때 즈음엔 “만석이니 종 소리를 기다리시오” 안내문이 보였다. 줄은 금방 줄어들었다. 10년 전 한국 찜방을 간게 마지막인데, 뜬금없이 타국의 찜방이라니. 하긴 나는 올해 감자가 될 줄 알았나.


이곳은 특이하게도 락커부터 휴식공간까지 이어진 한쪽 벽이 전부 유리창이었다. 자연광 넘치는 찜방이라니. 수건 3장을 받고(여기도 주는 수건 수는 비슷하다) 락커를 찾아갔다. 바로 옆 수면실은 어두웠다.
통로와 방에 빈틈없이 사람들이 벽을 채우고 있다. 닫힌 문틈으로 소리가 새어나온다. 옷을 벗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둘러보니 다들 습식 사우나를 들렀다가 샤워를 하고 나오는듯 하다. 코스인가? 사우나에 들어갔다. 사우나는 제법 더웠고 증기로 가득했다. 예닐곱 명만 서 있어도 몸이 닿을 수밖에 없는 공간에 처음엔 다들 벽에 붙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잠깐, 옆에서 누군가 나를 만졌고, 나도 그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사우나 안쪽으로 이끌었다. 암실이다. 암실은 더 좁았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삽입을 시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눈치였다. 적당히 포기하고 나갈 거라 예상는데, 별안간 나를 사우나 바닥에 눕혔다. 당황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쉽게도 박력에 비해 진도를 내지 못했다. 사우나 열기에 예상치 못한 전개가 더하며 숨이 찼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사우나에서 나와 씻고 수면실로 들어갔다. 여기도 사람이 빼곡했다. 몇은 사우나 앞 소파에 앉아서 쉬고, 그외에는 벽과 복도에 등을 붙이고 서있다. 살면서 이렇게 많은 남자가 섹스하거나 구경하기 위해 모여있는 걸 본적이 없다. 이 장관을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지만 사우나가 좀 더 끌렸기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우나에서 보냈다.
몇번 사우나를 들어갔다 나오고 잠깐 쉬고 싶어졌다. 락커와 수면실 반대편의 휴식 공간으로 갔다. 옛날 헬스장 컨셉의 카페가 있다면 이런 풍경이었을까. 다들 테이블과 소파에 앉아서 쉬고 있는 풍경이 수면실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곳 역시 자연광이 은은하게 들어와서 어두운듯 밝은 듯 그 사이 어디에 머물러있었다.
사우나와 수면실을 번갈아 엎치락 뒤치락 이리저리 휩쓸려 섞이고 감기다가 열고 닫으며 주고받고 구르다 보니 거의 세 시간이 흘러있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이대로 더 들어갔다간 탈수가 날 거 같아 나가기로 한다. 더 있고 싶어도 수건 세 장을 모두 써버려서 (당일은 추가 지급이 없다고 했다) 더 있기도 어려웠다. 락커 키를 반납하고 문을 열고 나오니 대기줄은 4층부터 1층까지 이어져있었다. 부지런한 게이는 충분히 즐거웠으니 님들도 즐거운 시간 보내십사 마음으로 기원하며 오늘 밤은 조신하게 술만 마시고 쉬기로 다짐했다…고 쓰지만, 앞서 다짐은 깨지라고 하는거라는 얘기 기억하시는지… 한국 친구들이 모여있는 클럽에 갔다가 이튿날 갔던 클럽에서 마감 찍고 나온 건 안비밀이다.
4.
드디어 귀국날. 아침 10시 체크아웃을 하고 저녁 6시 비행기 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공항까지 거리는 있지만 최소 4시간의 여유가 있다. 문득 어제 갔던 찜방에 다시 가볼까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대로 사우나도 즐기고 어제는 눈길도 안준 헬스장에서 운동하고 가면 되니까. 역 사물함에 캐리어를 넣고 찜방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어제처럼 사람이 많지는 않고 30명 정도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월요일 아침치고는 많은 편이라고 한다) 두번째 방문이면 단골이다. 익숙한 마음으로 사우나로 향했다. 전날도 식성인 사람이 많았는데, 오늘도 눈에 띄는 한명이 있었다. 거절을 예상하며 손을 뻗었는데 그쪽에서도 응답이 왔다. 어제 사람들로 빼곡했던 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냈다. 볼일을 보고,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 쉬면서 그 사람이랑 이야기 나눴다. 올라가볼 생각도 못했던 옥상에 올라가서 담배를 태우기도 했다. 생각보다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은 빨리 왔고, 마음같아서는 그 사람이랑 한번 더 놀고 싶었지만 아쉬움을 남긴채 나왔다.
지난 대만 여행에서는 다크룸의 재미를 알았고, 이번에는 찜방에 대한 즐거움을 알았다. 대만을 방문할 때마다 레벨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문득 한국에 가면 다시 찜방에 가볼까 생각이 들었다. 타이베이처럼 재밌기는 어려울 텐데, 더 배타적이진 않을까? 를 생각했지만 쪼렙의 안일한 마인드였다. 여행 바로 다음 주에 국내 모 찜방에 첫방문을 하고 한동안 격일로…이후 이야기는 다음에 들려드리겠다. 구르는 감자는 싹이 나지 않는다. 구르고 굴러서 산넘고 바다건너 국경을 넘나드는 햇감자의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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