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 (행성인 HIV/AIDS인권팀)
종종 번개할 때 사랑한다고 말한다. 섹스적 허용 또는 쾌락을 위한 거짓으로 치부하지만, 나는 진심이다. 찰나의 관계에 연루된 ‘찰나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을 서술하는 이유는 섹스라는 도피가 해답지로 변하는 가능성의 순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왜 섹스가 도피냐고?
게이인 나는 섹스에 미쳤다. 누군가는 과잉성애화 됐다고도 한다. 여하간 내 친구들이 모였다면 남자로 시작해서 섹스로 끝난다. 난 안팔리고 잰 잘팔려서 시기심에 톡방이 터지고, 클럽에만 가면 어떻게든 팔리고자 하는 인생. 게이에게 실망하지만 또 다른 게이를 향해 욕망하는 인생. 그게 활동하는 호모의 삶이자 게이 커뮤니티에 속한 어떤 사람의 모습이다.
팔리는 건 즐겁지만 외로운 일이다. 대립하는 감정들은 역설적이게도 함께 공존한다. 끝없는 거절 속에서 외로워하다가 극적인 팔림의 체결이 주식 호가창마냥 이루어졌을 때, 기뻤던 기억을 잊지 못해 슬롯머신의 레버를 계속 당기는 도박꾼이 된다. 어플을 새로고침하며 끝을 알 수 없는 팔림의 논리 속에 내 몸의 주권을 스스로 양도한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주인인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드는 고민이 있다. “게이인 내가 과연 진짜 남자일까?” 그리고 게이들이 원하는 소위 ‘팔림직한’ 남자는 사회에서도 남자로 받아들여질까? 이바닥에서 남성성 끝판왕처럼 말하는 ‘일틱’을 생각해보자. 일테면 각진 수염에 날카로운 외모, 운동한 탄탄한 근육에 적당한 지방, 마지막으로 저음의 목소리에 털털한 성격까지, 그러니까 남자로 보이는 요소들을 조각보처럼 구겨넣고선 “짜잔~ 남자같은 남자가 탄생했네요”하는 거다. 정작 이 나라에서 정상 남자라고 여겨지는 수도권 근교의, 소위 동탄과 운정의 공대남들은 그런 요소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로 아내랑 유모차 끌고 스타필드에서 쇼핑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게이임을 말하고 다니는 오픈리인 나는 유난히 크로스핏 박스(체육관)에서만 벽장(은둔)이 된다. 정확히는 이성애자 남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연기한다. 대표적으로 절대 샤워실에서 타인의 성기를 보지 말 것. 코치님을 성적으로 생각하지 말 것. 애초에 ‘정상’ 남자였다면 의식할 필요가 없었지만 ‘게이’니까 생각하는 것이다. 들키는 순간 남자들의 공간에서 쫓겨날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인 남자다움을 구성하는 건 반동성애가 기본값이다. 남자를 성적 대상화하지 않으므로 크로스핏 박스 속 남자다움은 유지되고, 덕분에 탈의실은 성적으로 무균실이 된다. 괜찮은 남자를 보고서 드는 순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끌림은 억지로 눌러야 한다. 매일 사회에서 당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게이들이란 껍데기만 남자인 이들이고, ‘게이를 사회적으로 종속된 위치에 놓게 하는’ 폭력을 당하는 이들이란걸.
하여 다음의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게이는 주민등록상 뒷자리 첫째가 홀수일지라도 일반적인 남자다움, 즉 남성성에 단 한번도 포함된 적이 없어왔다고 말이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게이들이 만든 남자다움이란 으레 생각하는 ‘정상’ 남자의 요소를 대충 조합해서 조각보처럼 가공하는 것이다. 덕분에 일반적인 남자 이미지의 특정한 부분만 확대하고 또 다른 부분은 소거된 채로, 특유의 남자다움이 탄생했다. 출력물은 뒤틀릴 수밖에 없다. 과감하게 이야기하면 단체로 게이적 실어증에 얽혔다. 빼앗긴 남자다움을 대신하기 위해 팔림의 논리와 섹스 중독을 선택했는지 당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저 팔림과 섹스가 결합하면서 섹슈얼한 환상을 만들어냈음을 목격했을 뿐. 게이가 가진 ‘~다움’이라는 환상은 각자 다른 듯 보여도, 타인을 틀에 맞춰 재단한다는 점에서는 유사하게 작동한다.
어플을 켜고 ‘직접’ 상대를 찾고, ‘직접’ 옷을 벗는 과정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무언갈 하면 낯선 남자가 반응을 한다. 그의 거친 손길이 내 몸에 닿고, 그가 욕망에 찬 눈으로 나를 응시할 때, 비로소 희미했던 감각이 선명해지는 착각에 빠진다.(사실 이게 착각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누군가 날 원한다. 고로 난 존재한다.”라는 욕망의 존재론이 탄생한다.
그들이 원하는대로, 살아있는 몸들을 조각 조각 해체해서, 다듬고 또 다듬어 아름답게 조리했다. 자유라는 착각 속에 몸을 잘만 도축했다. 진열대 위에 올라가 생기를 잃어가며, 난 잭디에서, 그라인더에서, 구몬에서 실시간으로 팔린다. (당신이 글을 읽는 시점에도 아마 팔리고 있을거다. 이미 내 몸의 등급을 매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롭다는 착각 속 거대한 팔림의 논리에 맞게 몸은 가공된다. 가공육 덩어리가 된 우리에게, 자신의 몸은 그저 타인이 가치를 알아보고 가격에 맞게 거래되는 상품에 불과하다.
C.S. 루이스의 『이성에서의 도피』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죽었다. 신도 죽었다. 인생은 의미 없는 삶의 존속뿐이며, 인간은 거대한 조직의 일개 부품일 뿐이다. 유일한 탈출의 길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체험, 약물, 광기와 같은 비이성적, 비합리적 판타지 세계에 있다.” 라는 문장이 이 사태와 어울린다.
게이들에겐 판타지 세계의 열쇠가 섹스로 이어진다. 죽어가는지 죽음을 자처하는지 조차도 판별할 수 없는 정신은 비명을 지른다. 살아있기 위해 강렬한 신체적 자극을 원하게 되고, 상대방의 거친 숨소리를 기억하게 만들며, 사정의 순간만을 부여잡은 채로, 섹슈얼한 판타지 세계에 나를 결탁시킨다. 만날 때마다 덧칠해지는 ‘새롭지만 영원할 남자’를 향한 환상을 세우고 불안에서 도망친다. “나는 이런 남자를 만났으니, 이보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날거야. 결국엔 가장 최고를 만나겠지”라면서. 개별 섹스 후에 발생할 즐거움은 미래에 발생할거라 믿는 거대하고 완전한 쾌락의 이자로 납부된다. 이 섹스는 단순한 쾌락 추구가 아니다. 내 자신의 불쾌함을 잊게 만드는거다.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우울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한다. 이건 일종의 채무 ‘유예’지 ‘탕감’이 아니다. 평생 섹스만 할 수 있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현생 속에서 도피처로서 섹스는 언젠가 끝난다. 이를 막기 위해 환상은 끝없이 바뀌며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 자신보다 더 잘나보이는 게이를 계속 욕망하고 따라하며 자기 환상에 복무해야 한다. 각기 내용은 다를지 몰라도 자기를 연기하거나 그렇게 된다. 우리들의 환상은 우리를 급진적인 미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유예의 늪에 빠지게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어플을 돌리며 프로필을 스크롤하고, 방문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며, 과장된 중저음의 목소리로 ‘수건은 어디다 둘까요?’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는 러쉬향 폴폴나는 머릿결로, 집으로 가는 지하철 의자에 앉아 외롭다고 또 다시 되뇌이며 어플을 누를 것이다. 제발 나 좀 봐달라고, 자기 언어를 잃은 채 방황하는 내 안의 작은 게이 소년을 그리워하면서, 나조차 모를 진짜 내 자신을 누군가가 알아봐주길 바라며 말이다.

그러면서도 난 섹스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낯선 남자에게 사랑을 말할 때, 그는 반응한다. 대개는 찰나에 그치겠지만. 찰나와 사랑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간격에서 난 불편함을 느낀다. 사회적 ‘이상’과 환상이 만드는 ‘사랑’의 차이에 의해. 또 다른 남자로 도피하기에 앞서 여지껏 우리를 점령해왔던 여러 감정들을 말한다. 불편함을 입 밖으로 던지는 건 굉장히 힘들지만, 이 감정들이 내게 지워진 것임을 폭로하기 위해. 서로 대립하는 자신의 감정들을 인정하고 질문하는 순간 끝없는 환상의 도미노는 멈춘다. 그런 의미에서 불편함의 힘을 믿는다. 게이를 배제해온 ‘남자다움’의 규정과 단절하는 힘은 절대 오지 않을 ‘완벽한 남자’란 환상을 허문다. 여기서 새로운 가능성이 탄생할거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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