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

풍문으로만 들어왔다. 게이들이 맛있는 걸 먹고 마시며 논다는 것을.
1월의 어느 주말, 그 실체를 확인했다.
HIV/AIDS인권팀이 게이 섹스 포스터를 업소에 붙이기 위해 종로와 이태원을 거쳐 신림에 왕림했다. 집이 신림인지라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나도 합류했다.
게이 술집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매일 지나다니는 바로 그 길에 그렇게나 많은 줄은 미처 몰랐다. 열두 군데 업소에 포스터를 부착하고 그 중 한군데로 뒤풀이를 갔다. 8시가 좀 넘으니 가게 안이 남성들로 꽉 들어찼다. 왠지 힙해보였고 덩달아 나도 쫌 힙하게 느껴진다. 굴보쌈과 야채만 넣은 마라샹궈를 시켰는데, 가히 압도적인 비주얼의 음식들이 테이블을 점령했다.
이렇게나 푸짐한데.. 가격이… 그럴 수는 없었다(있었다). 너무나 좋아서.. 충격이었다. 기분이 상승한다. 끼가 안나올래야 안나올 수 없구나!!
2차로 간 와인바 역시 퀄리티가 상당했다. 이런 걸 게이들만 먹고 있었다니. 나는 앞으로도 올 수가 없다니. 게이가 되어버릴까.
모든 레즈비언 술집이 그런 건 아니지만, 음식에 무신경한 레즈비언 술집을 너무도 많이 봐왔다.
사실 레즈비언 사장님들은 그냥 일반 술집을 운영하지, 레즈비언 술집은 안 차린다는 말도 자주 들었다. 시장성이 없어서 맛이 없는 건지, 맛이 없어서 시장성이 사라진 건지. 레즈비언들 정말 각성해야 한다.
다른 동료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렇게 잘 먹고 잘 노는 게이들이 정작 활동할 땐 잘 안 보이더라, 고 한다. 혼인평등 운동엔 레즈비언들이 그렇게 많은데 말이다.
그러자 또 다른 이가 말했다.
“먹을 데가 없어서, 빨리 결혼해서 밥해먹고 살려고.”
게이들은 활동에 없고, 레즈비언들은 먹을 데가 없다. 법제도만큼이나 변화가 없는 이것이 현실이구나.
오소리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네요. 한국 나이로 37, 어느덧 서른 후반이 되었습니다. 뭐 해 넘어갔다고 안 그러던 게 갑자기 그러겠냐만은… 최근들어 더욱더 몸이 여기저기 삐걱대는 게 느껴집니다. 여행을 가면 셋째날엔 체력이 바닥나고, 툭하면 담이 걸리고, (원래도 그랬지만 최근에는 더더욱) 술 많이 마신 다음 날이면 몸에 이상이 오고, 조금만 무리하면 바로 몸살, 감기가 찾아오네요. 지금도 감기로 골골거리고 있습니다. ㅠㅠ 이대로 있다간 안되겠다…! 싶어서 올해에는 체력증진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운동(Movement)과 더불어 운동(Exercise)도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저를 만날 때면 운동은 잘 하고 있는지 한번 씩 물어보며 채찍질해주세요!
이안
해피 뉴 이어, 입니다! 새해라는 두 글자에는 늘 설렘과 긴장이 함께 찾아옵니다. 그래서 평소엔 지나치던 것들도 한 번 더 생각하고 살펴보는 계기를 주지요. 올해 저는 스스로를 위해 어떤 게 필요할 지를 지난 날들보다는 조금 더 진중하게 고민해보았어요. 내가 나를 잘 돌봐야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당연한 문장을 성실히 수행해보고 싶어졌지요. 그래서 정한 올해의 단어는 ‘단단해지기’ 입니다. 사실 이안이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몸과 마음이 상당히 예민한 편이고, 그걸 외면하며 버텨왔기에 늘 힘들어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크고 작은 스트레스가 오래도록 축적된 결과가 최근의 몸 건강으로 나타나는 걸 요즘에야 더 크게 느껴요. 그 사실에 속상해하지 않기는 힘들어요. 예민해서 억울하다거나 이런 생각을 안 하기도 어려워요! (하하) 하지만 나쁜 생각에 빠져버리기 보다는, 오히려 지금 뭔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초반이니만큼 성취도 더 크게 느끼며 즐겁게 건강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계속 하다보면 분명 어려워지는 구간도 생기겠지만 나중에 생각하자구요.
그래서 올해 서울여성마라톤 10km 코스를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목표 혹은 빌미삼아 2월부터는 생애 첫 PT를 받아보려고 짐 상담신청도 해 놓은 상태이지요. 음, 다른 이에게 나의 몸에 대한 정보를 보여주고, 몸에 맞지 않는 불건강한 습관을 함께 돌아보며 솔직하게 조언을 구하는 건 꽤나 부끄럽고 주눅 드는 일이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심지어 상대방이 아무리 따뜻하게 격려해준대도요!). 그래도 첫 걸음을 소중히 여기며 한 해를 건강하게 열어보겠습니다. 그래야 행성인에서도 더 다정하고,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분도 한 해 해내고 싶은 일들 차근차근 잘 해나가시길 바라요. 혹시 잘 해내고 싶은데 너무 어렵고 힘들면 잠시 쉬면서 주변에 일상들 꼭 나눠주시구요.
남웅
2019년까지 운영되었던 웹진팀은 한달에 두 세 차례 모임을 가졌다. 해당 달의 기획회의와 발행 직전 원고를 취합해서 함께 보는 교정교열의 시간. 중간 점검차 모임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한달에 세 번 만나는 건 쉽지 않으니까 나름 효율성을 찾아갔다. (팀 있기 전엔 운영회의에서 웹진 논의도 같이 했다.)
웹진은 기획회의도 중요하지만, 팀 활동의 백미는 교정교열이다. 글은 쓰는 것만큼 읽고 편집하는 것도 품이 든다. 내 얘기 하는것보다 남의 얘기 듣고 읽는 것은 더 그렇다. 글쓴 사람의 의도와 문장을 살피는 것도 그렇지만, 웹진의 독자까지도 고려하면서 문장을 다듬어야 한다.
교정교열은 매달 말 일요일에 진행했다. 주말을 반납하고 사무실에 나와 팀원들이 글을 하나씩 돌아가며 체크했다. 반나절 넘는 시간동안 연필로 자구와 맞춤법을 수정하고 완료하면 이름을 써서 다른 팀원에게 돌아간다. 그렇게 모든 팀원이 모든 원고를 보고 모두 체크하면 한자리에 사무실 컴퓨터와 가져온 노트북을 열어 맡은 원고들을 업로드한다. 그리고 화면교정을 통해 표지를 구성한다. 최종 발행은 편집장의 역할이다.
지금은 웹진 채널인 티스토리 기능이 달라지고, 웹진 팀 해산 이후에 사무국에서 웹진을 주관하면서 구성과 편집과정이 많이 달라졌다. 일인출판처럼 웹진을 운영하는지라 팀원들이 기자를 겸하던 시절처럼 20여 개의 기사를 내놓지는 못하고, 원고 구성도 사무국 활동가들과 연재의 비중이 커졌다.
꾸준히 에세이를 쓰고싶다는 고마운 제안들이 온다. 대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데, 자기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에세이가 늘어나는 퀴어 출판계나 일인 미디어 환경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제안을 당연히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편집자로서 행성인의 웹진인 만큼 좀 더 감정을 덜고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방향을 요청한다. 하여 글쓰기는 편집자와 필자 간에 이뤄지는 토론으로 이어진다. 글에 실존을 온전히 담지 말기를 당부하며 피드백을 아끼지 않는 편이다. 단체 웹진에 글을 올리는 일은 자기 이야기를 정리하고 타인에게 전달하는 연습이다. 피드백을 주고 받는 일도 활동의 일환이다. 성소수자 인권단체의 웹진이기에 참여한 활동이나 관심 있는 의제들에 사적인 이야기와 고민을 녹여내는 방식을 제안하거나, 참조할 수 있는 문화컨텐츠나 정치사회 뉴스 등도 활용해주십사 제안하기도 한다.
적잖은 격무지만 효능과 즐거움을 갖고 임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이 프로세스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남는다. 안 그래도 근래 세운 목표 중 하나는 내가 없어도 빈자리가 금방 메워질 수 있는 활동을 하는 일인데(물론 독보적인 캐릭터의 공백은 클것이지만..훗), 해서 웹진을 두고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드는 것이 올해의 계획이다.
그 시작으로 '읽기모임'을 열었다. 매월 첫주 목요일 웹진을 읽고 가감없는 비평의 시간을 가질 예정이다. 쓰는 것 만큼 읽는 연습이 필요하고, 그것을 어떻게 소화했는가를 너머 이후에 더 좋은 글과 기획이 나오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각각의 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불어 어떻게 쓰이면 더 좋았을지를 이야기 나눈다. '가감없는 비평'에는 분석할 때 사족같은 감정과 불만을 담지 않는 것 또한 포함한다. 비평도 활동이라는 점을 고려하면서, 이후에 웹진에 어떤 글이 실리면 좋을지도 이야기하고 가능하다면 읽기모임의 참가자들이 '내가 쓰고 말지'의 기세로 글까지 써버리면 더 기쁘겠다.
호림
3개의 해외 출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2월 첫 주에는 무지개행동과 대만의 TEC, 일본의 J-All이 함께하는 EA Alliance의 향후 활동을 계획하는 워크샵이 대만에서 있고, 바로 그 다음주에는 태국에서 아시아 지역에서 혼인평등운동을 하는 단체들이 모이는 행사가 있습니다. 3월에는 UN 여성지위위원회(CSW) 세션 참여를 위해 미국에 다녀옵니다. 이 일정만으로도 거의 한 달을 외국에서 체류하는 것인데요. 하반기에도 1-2개의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서 올해는 많은 시간을 한국 밖에서 보내는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성소수자 활동가로 외국에서 열리는 국제 행사에 처음 참여한 것은 2014년에 토론토에서 열린 월드프라이드인권컨퍼런스가 처음이었고, 그 이후로 종종 일가 아시아 컨퍼런스와 같은 지역 행사에 참여해 왔습니다. 본격적으로 출장이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상임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한 이후인데요. 무지개행동의 이런저런 국제 활동을 담당하게 되고, 또 모두의결혼 활동과 관련한 국제 교류가 증가하면서 한 해에 1-2번 이상은 해외 출장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국제활동이나 해외출장이 많은 것은 영어 의사소통이 비교적 원활한 사람들에게 집중될 수 밖에 없는 다소 특권적인 ‘기회’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영역에서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해서 일하는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고, 국제적, 지역적 운동의 여러 정보와 자원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개인 활동가에게 역량 강화의 계기가 되기도 하고요. 지금 제가 그런 기회들을 많이 얻고 있는 만큼 이를 통해 쌓이는 정보와 경험, 네트워크를 어떻게 잘 나눌 수 있을지, 다른 활동가들과 기회를 어떻게 나눌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도 저의 숙제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성소수자와 관련한 인권 규범이 후퇴의 위기에 놓여있고, 성소수자 운동의 자원이 축소되고 있는 현재의 맥락에서 다른 방향의 고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이 국제적인, 지역적인 성소수자 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지, 이런 고민을 한국의 동료들과 나누고 또 우리의 할 일을 찾아나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입니다. 반-젠더, 반-권리의 반동이 거센 어려운 시기에도 국제 성소수자 운동에 헌신하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만날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작다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다양한 갈래의 고민들은 쌓이지만, 현실은 주어진 활동과 역할을 소화하기에 급급한 수준입니다. 본격적으로 이런 저런 활동을 시작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경험을 쌓아나가는 중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매일같이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소식들이 한국 밖에서 들려오는 시간들을 통과하며, 미약한 일이라도, 작은 역할이라도 ‘국제 운동’의 끈을 잘 붙잡고 있어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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