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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코코넛의 눈코입귀

[코코넛의 눈코입귀] 트랜지션 하면 죄인이라고요?

by 행성인 2026. 2. 19.

코코넛 (행성인 HIV/AIDS인권팀)

 

 

 

필자 주: 이 글은 필자의 신앙에 따라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썼습니다. 해당 종교의 교리와 신학에 대한 묘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구를 준비하며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가톨릭 교회 안에서의 자리, 혹은 그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다. 수십 년에 걸친 가르침이나 문헌, 입장은 본질적으로 거의 변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성확정 수술이나 의료적, 사회적 트랜지션은 창조 질서와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여성과 남성이라는 성별 구분을 거스르며 인간 존엄성을 위협하는 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부당한 대우나 인권 침해는 용납할 수 없으며 사목적으로 친절하게 대해 줘야 한다고 말한다. 2023년에는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무려 세례성사 때의 대부나 대모, 혹은 혼인성사의 증인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입장이 나왔다. 이전에 쓴 웹진 원고에서도 사용한 표현이지만, 정말 뭐하자는 건지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가톨릭 신학을 전공한 내가 학사학위 논문 주제로 트랜스젠더 영성을 택했을 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지 느낀 막막함은 예사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관련 주제에 대한 선행 연구 부재와 나의 게으름을 포함한 여러 난관이 있었다. 그럼에도 무사히 논문을 마칠 수 있던 결정적인 이유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지도 교수님께서 논문 주제에 대해 큰 관심과 흥미를 보이시며 참고할 수 있는 자료를 여럿 제시해 주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학사학위 논문이니 석사나 박사 논문만큼의 품과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졸업을 무사히 하고, 진보 성향의 가톨릭 계간지에 논문을 다듬은 비평도 기고하고, 논문을 바탕으로 지금 이 글도 쓰고 있으니 여러모로 해피엔딩이다.

 

학사학위 논문이라도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트랜스젠더이면서 가톨릭 신자의 정체성을 가진 당사자들을 찾아서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교수님도 동의하셨다.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우선 주변의 성소수자 중에 성당이든 교회든 매주 꼬박꼬박 나가면서 예배(혹은 가톨릭 교회의 용어대로 미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했다. ‘가톨릭 신자라는 범주는 미사에 성실히 참여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가톨릭 교리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따금씩 개인적인 기도 등의 신앙 생활을 실천하기도 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다.

 

유연한 기준을 가지고 면담 대상자를 꽤 오랜 시간 동안 물색했지만 의료적, 사회적, 법적 트랜지션을 경험한 트랜스젠더 당사자 중에는 해당 기준에도 부합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트랜지션을 경험한 당사자들의 경험을 듣고 싶었기에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느정도 예상한 바였기에 크게 당황하진 않았다. 시스젠더인 성소수자나 트랜지션을 경험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도 가톨릭 교회 안의 차별과 혐오적인 언어에 상처를 받고 신앙을 유지하기 힘들어하는데, 가시화된 트랜지션을 경험한 당사자가 경험하는 장벽은 그보다 더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저찌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두 명을 찾았다. 한 명은 나와 친분이 있는 행성인 상임활동가(A라고 하겠다)였고 나머지 한 명은 친한 형의 애인(B라고 하겠다)이었다(논문을 다 쓰고 보니 그분 역시 행성인 회원이다). 지면을 빌어 논문에 도움을 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에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내 모습 그대로 신과 마주하기

 

면담 대상자 모두 트랜스젠더 정체성과 신앙을 양립하는 여정을 이야기할 때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말했다. A가 냉담(미사나 고해성사 등 가톨릭 교회에서 요구되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기간을 끝내고 다시 성당으로 나가게 된 계기 중에는 성소수자 의제를 다룬 예술 작업과 관련 인권활동에 참여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본인이 지금까지도 신념으로 삼고 있다고 답한 믿음, 희망, 사랑(‘향주삼덕’, 혹은 주/하느님을 향한 세 가지 덕이라는, 가톨릭 영성 신학에서 영적 여정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하는 덕목들이기도 하다)과 성소수자 인권운동에서 느낀 연대와 사랑의 가치는 다른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B 또한 성소수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면서 성소수자 혐오적인 종교의 교리나 신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된 이유로 가톨릭에서 말하는 사랑’, 혹은 서로 사랑하여라는 성경 구절을 언급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창조하시고 사랑하신다면, 성소수자라는 스스로의 정체성 또한 하느님께 사랑받는 요소이고, 받아들이는 데에 모순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랑믿음’, 그리고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영적 여정을 이어가는 성소수자와 신의 관계는 두 면담 대상자가 트랜지션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긍정적으로 응답한 이유이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트랜지션을 경험하지 않은 트랜스젠더 당사자였고 추후의 트랜지션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는 정도도 달랐지만, 트랜스젠더의 자발적인 트랜지션이 신앙과 영적 여정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트랜지션 경험이 있는 당사자의 말도 듣고 싶었던 점이 아직까지 아쉽지만, 이는 훗날을 기약하기로 하자.) B는 앞서 말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다시 언급하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주변의 사람들과 신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 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트랜지션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영적 여정에도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것이다. 트랜지션을 통해 있는 나로 살아가는 것이 신과 트랜스젠더 당사자와의 관계에 도움이 될 것이라 응답한 A, 트랜지션으로 인한 교회 공동체와 사회의 차별과 배제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해 그럼에도신앙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영적 여정에 많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두 면담 대상자 모두, 본인의 성소수자, 특히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로서의 정체성 자체보다도 가톨릭 교회의 소수자 혐오적인 교리와 언어,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 느낀 배제와 장벽이 두 정체성을 양립하는 데 큰 어려움이었다고 응답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가톨릭 교회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제대로 포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적 여정에 필요한 요소들을 제공하지 못함을 알게 한다.

 

면담 대상자들과 나눈 이야기들은 논문에 신학적 근거로 삼은 자료들에 대한 해석과도 일맥상통한다. 교수님이 추천해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몸의 신학을 참고했다. 『몸의 신학』 은 원래 하나의 책이나 자료가 아니고 요한 바오로 2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강론 등에서 말한 인간의 몸과 영혼, 그리고 성()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문헌이다. 여기에는 문헌을 퀴어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치명적인 여성과 남성으로 창조된 몸이 상호보완적 관계를 지닌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돌로 쳐 죽여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남성과 동침하는 남성을 돌로 쳐 죽여야 한다와 같은 성경의 워딩들도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여 문자 그대로 지켜지지 않으니, ‘몸의 신학에서 보다 본질적으로 말하는 인간의 몸과 영혼, 그리고 신과의 관계에 더 초점을 맞추어도 될 것 같다.

 

가톨릭 신학을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관점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현재 트랜스젠더에 대한 가톨릭 신학의 가장 기본 전제, 그러니까 인간의 생물학적 성과 성 정체성, 사회적인 성은 분리될 수 없다는 문장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만나서 이야기 들려준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몸은 의료적 트랜지션을 거치지 않고, 외관적으로는 시스젠더 여성과 남성의 몸으로 보인다. 하지만 몸의 신학에 따르면, 몸과 영혼은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는 통합된 것이고 몸은 영혼의 가시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성적 정체성이 그들의 신체에 따라 주어진 지정성별과 다르다면, 그들의 몸은 분명 시스젠더 여성과 남성의 몸과 다를 것이다. '인간이 이라는 사실은 그가 자신의 신체적 구조상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사실보다도 더 깊게 위격적 주체(신과의 관계에 있는 인격으로서 나를 말한다)의 구조 안에 속하게 된다'는 『몸의 신학』문장은, 퀴어 신학의 관점으로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강한 근거가 될 수 있다. 트랜스젠더의 몸이 어떻게 보이든 간에 그들의 영혼에서 보이는 정체성은 몸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고, 물리적인 신체보다 더 본질적으로 영적 여정에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 질서와 인간 존엄성을 위협하는 죄라고 가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의 트랜지션은 어떨까? 트랜지션이 (『몸의 신학』에 나오는 워딩대로) ‘몸의 표현영혼의 의도를 일치시키는 방향이라면, 이것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신 앞에서 보이는 자기증여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트랜스젠더인 가톨릭 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과 트랜지션으로 인한 교회 공동체의 차별과 혐오, 배제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유지하며 영적 여정을 지속하면, 신학적으로는 그것 자체로 그들이 자신의 몸을 신 앞에 보이는 자기 증여이며, 신의 부름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은 영적 여정과 신앙 생활에서 성소수자가 아닌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도전과 난관을 마주한다. 이러한 그들의 여정에 필요한 공동체적 기반을 교회가 제공해 주지 못함에도 그들이 유지하는 신앙은 하느님의 신비라고 해석되며, 그들의 자신의 솔직한 몸과 영혼으로 신 앞에 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내 주변의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리스도교 교회에 상처받고 배척당하거나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내가 나의 정체성을 배척하고 이에 대해 수군거리는 공동체에 받은 상처는 내가 논문 주제를 선택하고 논문을 완성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트랜스젠더들이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 단죄하며 젠더 이론을 부정하는 종교인들 중에 누가 정말 더 큰 죄인인지를 예수가 지금 이 시대에 재림해서 판단한다면, 결론은 사실 분명할 것이다.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들이 스스로의 성적 지향과 정체성에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은 신학적으로 해석했을 때 진정한 몸과 영혼으로 신 앞에 서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 모두, 신을 믿든 믿지 않든, 잘 살아가고 있다. 비록 학사 학위자지만, 이 말은 믿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