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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

[활동가 연재] 상임활동가의 사정

by 행성인 2026. 2. 19.

 

지오

 

지난 2월 초에 체제전환운동포럼이 열렸습니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는 포럼입니다. 이번에는 체제전환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는 자리였던 것 같아요. 올해 포럼의 주요 화두는 공공성이었는데요. 그동안 체제전환운동을 함께 하면서도 저는 이 막연한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늘 망설이고는 했었어요. 누군가 “그래서 그게 뭐야?”라고 물으면 대답을 얼버무리곤 했죠. 

 

그런데 포럼을 다녀오고 나서는 조금은 더 또렷해진 것 같아요. 공공성을 통해 돌봄사회를 만드는 것.


그러니까,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되는 사회, 돌봄을 돈과 운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지도록 만드는 것. 지금의 저는 체제전환을 이런 말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돌봄 문제에 대해 종종 생각해왔어요. 제가 나이를 먹고 있기도 하고, 혼자 사는 엄마의 늙어감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죠. 얼마 전에는 불현듯 간병비 지원 보험을 찾아봤습니다. 그런 불안은 예고 없이 찾아오더라고요. 보험 상품을 비교하며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데 짝꿍이 말했습니다.

 

“보건의료노조에서 통합간호간병 서비스를 확대하려고 애쓰고 있어. 보험 들 돈으로 거길 응원하는 건 어때?”

 

그 말을 듣는 순간, 조금 머쓱해졌어요. 공공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나 역시 결국은 개인이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달리고 있던 건 아닐까. 이렇게 공공의 문제를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밀어두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이 불안을 곧장 투쟁의 방향으로만 돌려놓을 수 있을까요. 아마 저는 앞으로도 계산기를 두드렸다가 또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가 그렇게 오가기를 반복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반복의 비중에 개입해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어요.

 

최근 몇 년 사이, 나이듦을 둘러싼 논의와 준비들이 활발합니다. 특히 제도적 공백 속에 놓인 퀴어들에게는 더 절실한 화두이기도 해요. 개인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대비책들도 나오고 공동체를 만들고 지지망을 고민하는 움직임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저는 자꾸 묻게 됩니다.

 

이 사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아직은 저에게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시작해보려 해요.

 

행성인 안에서 올해 중장년 모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거창하기보다 각자의 경험과 불안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모아가는 자리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3년동안 말만 뱉던 것을 추진해보려 하니 떨리기도 하는데요. 다행히 함께 할 동료들이 있어 안심도 되고 힘도 납니다. 이렇게 천천히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되는 사회로 나아가 볼 수 있으리라 믿어요.

 

 

오소리

 

다들 설 연휴는 즐겁게 보내셨나요? 5일이나 되는 긴 연휴였는데 저는 짧게만 느껴졌네요. 등산도 가고, 시골집도 방문하고, 집에 사람들 초대해서 함께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먹고 윷놀이도 하고, 친구 만나서 술도 한 잔 하고. 시끌벅적, 정신 없이 보냈습니다. 연휴 이후에는 총회 준비로 또 바쁘게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2월도 다 가버렸네요. 총회를 기점으로 행성인은 본격적으로 한 해 활동을 시작할텐데, 그러면 또 정신없이 상반기가 지나가버리겠지요. 참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재밋거리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24년에 보드게임 소모임 큐플레이를 만든 것이나 작년에 행성인 오락실을 기획한 것도 그 일환이었는데요. 올해에는 홈페이지 개편 TF팀을 행성인 컴퓨터실로 개편하여 또 재미있는 것들을 궁리 중입니다. 행성인 활동을 함께, 재미있게 즐겨봅시다. 3월에는 또 어떤 재미있는 일이 찾아올까요. 따뜻해진 날씨와 함께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2월의 마지막을 보내봅니다. 

 

가라오케에서 신난 오소리

 

 

이안

 

행성인 정기 회원총회를 앞두고 오랜만에 인디자인과 한참 씨름을 했습니다. 인디자인은 출판/인쇄물 편집디자인 프로그램인데요, 원래는 구입, 설치하는 방식이었는데 몇년 전 구독서비스로 전환되면서 업데이트가 잦아진 것 같아요. 문제는 그만큼 오류도 잦아서 애를 먹었던 거죠(방금 이 글을 적으면서 프로그램 만든 회사에 지독하게 저주를 퍼붓다가 정신차리고 지웠습니다). 디자인은 행성인 오기 전까지(사실 지금도) 하던 일이라 꽤 자신있어하며 “전문가에게 맡겨만 주시라” 하는 마음으로 가져와서 작업했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자꾸만 생겨서 너무 당황했습니다. 하필 자유롭게 다룰 줄 아는 게 디자인 프로그램 뿐이라 중간에 다른 방법으로 바꿔볼 생각도 못 하고… 답답해서 온몸이 펑! 터질 것 같았어요. 보통 이런 건 그냥 문서 프로그램으로도 다들 잘 한다던데… 아, 진작 한글문서 기능 좀 배워둘걸. 독스랑 워드는 그냥 메모장 아냐? 했던 시간들을 후회했죠. 조만간 문서 작업하는 분야를 새로 배워야 하겠구나, 또 다시 느낍니다. 느끼기만 하고 미루고 공부 안 하면 어쩌지…

 

어릴 때 본 게임 스타크래프트 플레이 화면 속 지도가 생각납니다. 직접 해본 적은 없습니다. 전략게임?은 너무 어려워요. 아무튼 플레이어가 탐색하고 나아간 만큼 미니맵에서 가려진 부분이 드러나면서 그려졌던 걸로 기억나요. 막상 가봤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 땅이기도 하고, 다른 곳엔 뭔가 보석같은 게 있기도 하고, 아뿔싸 상대방이 놓은 함정 같은 게 숨어있기도 하고. ‘영역이 넓어진다’는 문장을 글자 없이 설명하는 느낌이었어요. 일이든 사람이든 무경험의 세계라는 건 그대로 두면 영원히 가려진 채로 남을 뿐이겠지요. 그걸 드러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보여요. 어쩌면 그저 뚜벅뚜벅 나아가면 뭐라도 될 것 같은데, 당연히 말처럼은 잘 안 됩니다. 

 

아니지, 이상한 일이에요. 지나가버린 그 언젠가 속에도 지금처럼 한 발 앞을 전혀 모르겠는 수많은 순간들은 분명 있었을 텐데요. 왜 요즘에야 새로운 영역에 손 대고 발 들이는게 유독 어렵게 느껴질까요. 아무래도 ‘하던 대로’라는 게 생겨버린 지라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새로운 영역이 궁금해서 스타크래프트 시도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진짜 어려워보여요. 그보다는 방금 한글문서에서 글자를 가나다 순으로 정렬하는 걸 처음 배워서 기쁘니 이런 걸 더 탐구해보고 싶네요. 

 

어쨌든 이 정신 못차리는 010101과의 씨름은 저의 한 판으로 가져왔고, 첫 총회 자료집 도전은 잘 마무리했습니다. 개발자들은 서비스를 출시하면 작업결과물에 오류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한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인쇄 발주를 넘기고 나면 제발 오탈자 안 나오게 해달라고 빕니다. 오랜만에 두 손 모아봅니다. 아멘.

 

 

남웅

 

취침 전후로 SNS 투어를 한다. 하루동안 수고했다는 보상의 일환이자 잠깐의 도파민 타임이다. 페이스북은 행성인 출근해서 실컷 보니까 패스하고 엑스랑 인스타그램, 틱톡과 유튜브를 순회한다. 보는 시간이 길어져서 어떤 날은 아예 평소 취침시간보다 몇시간 일찍 누워버리기도 한다. 불 다 꺼놓고 이불속에서 시청하는게 맛이 난다.

 

집중력을 좀먹고 시간을 죽이는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다. 그래도 좋은게 있다면 그때그때 뭐에 다들 꽂혀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는 거다. 요즘 어떤 챌린지들을 하는지, 어떤 크리에이터가 흥하고 쇠하는지, 누가 또 욕을 먹는지, AI로 어떤 음험한걸 끼려왔는지 굳이 몰라도 되고 모르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을 컨텐츠에 뇌를 절인다. 쇼츠와 릴스의 호흡도 길게 느껴져서 어떤 것들은 n배속으로 돌린다. 그와중에 너무 몰입하면 피로도가 높아질거라 우려하면서 억지로 다 보려 하지는 않는다. 치킨먹을때 제로콜라 먹는 마음, 일종의 배려다.

 

행성인 계정은 어지간해서는 쳐다보지 않는다. 아니다. 간혹 이슈가 생기면 잠깐 들러서 추이를 살핀다. 개인 계정으로는 팔로워를 만들지 않으며 소통하지도 않는 나로서 단체 계정은 지인들 동정과 여론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이번 설연휴도 그랬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레즈비언 커플을 다룬 책을 둘러싸고 당사자임을 밝히며 피해를 호소하고 문제제기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바짝 논쟁이 격화된 일이 있다. 책에 대한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 말을 얹지는 못하겠고, 출판사와 저자를 비판하는 글들에 대해 비판의 내용이 어디까지 온당한가를 살폈다. 그러면서 잠결에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나보다. 

 

일본 인디 레슬링 영상클립이 행성인 계정으로 공유되었다는 제보가 올라왔다. 티팬티나 작스 입고 게이 컨셉으로 기술 거는 선수들 나오는 그거...제보된 시간과 스샷된 게시 시간을 계산해보니 새벽녘에서 아침으로 이어지는 시점이다. 스멀스멀 영상클립이 기억나는 것 같기도 하고. 

 

정초의 삑사리라니. 이실직고하면서도 정말 식겁한 건 다른데 있었다. 실수로 공유한 게 레슬링 클립이길 망정이지, 실시간으로 격해지는 논쟁의 일부였다면. 간담이 서늘하다. 남은 연휴동안 수치심 속에 반성을 거듭했다. 

 

앞으로 이불 속에서 단체계정으로 쉽게 접속할 수 있는 SNS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올해의 금주 금연 목표 같은 건데, 그렇다고 당장 취침 기상 전후로 SNS 투어를 끊겠다는 다짐은 못하겠다. 

 

 

호림

 

10박 11일의 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해외 출장을 떠나기 전의 마음가짐과 현실을 크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확인한 경험이었습니다. 

 

해외 출장을 떠나기 전에는 항상 수많은 야심을 가집니다. 이유는 단순한데요. 이동수단 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고, 행사 참여든 트레이닝이든 일정은 한국에 있을 때보다는 여유 있게 짜여 있는 경우가 많아서 ‘공백 시간’이 많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비행기 안에서 밀린 일을 혹은 앞으로 해야할 일을 미리 해두겠다는 야심, 출장이지만 자주 오지 못하는 해외에 왔으니 관광을 하거나 쇼핑을 해야겠다는 야심, 평소에 잘 가질 수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있을테니 일상을 돌아보며 무언가 계획하는 나만의 시간을 보내보겠다는 야심, 평소에 읽지 못한 책이나 놓쳤던 영화나 드라마라도 보겠다는 야심. 출장을 준비하며 조금의 설렘이 있다면 그건 모두 이 ‘공백시간’에 대한 야심들 때문이고, 캐리어가 무거워지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책도 두 권쯤 넣고, 먼지 쌓인 다이어리도 넣어보고, 따뜻한 나라라면 수영복도 챙겨보게 되니까요.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합니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공항에 도착해 바쁘게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고 나면, 당장 촉박하게 마무리해야 할 일이 아니라면 노트북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가방을 무겁게만 했던 책을 한두 장 펼쳐 보거나 다운받아 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잠들기 일쑤입니다. 

 

여유 있어 보였던 일정에도 많은 함정이 숨어 있습니다. 출장 중에도 동료들의 일상은 평소대로 돌아가기 때문에 일정 중 쌓인 메일이나 메시지에 답하다 보면 쉬는 시간은 지나가 있습니다. 현지에서 새롭게 또는 오랜만에 만나는 활동가들과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는 것도 ‘공백시간’에 하려고 했던 일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중요한 출장의 일부입니다. 때론 현지에서 새롭게 추가되는 일정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종일 ‘영어 모드’를 탑재하고 하루를 보내고 나면, 일정이 끝나고 다른 업무를 더 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여유있게 짜여진 것 같아 보였던 일정의 빈 공간은 사실 인간의 한계를 고려한 필수적인 휴식 시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다음 출장을 준비할 때에는 다시 또 까맣게 잊혀져 버리지만요. 

 

이번 출장에서는 미리 계획했던 대로 함께 일했던 동료를 만나 하루를 함께 보내기도 했고,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지역의 미술관을 방문해 보기도 했습니다. 야시장에 놀러가거나 호텔 근처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시간이 있기도 했네요. 하지만 밀린 일은 밀린 채로, 챙겨갔던 책과 수영복은 캐리어를 나가보지 못했고, 대체로는 출장지 호텔 도보 10분 이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0일 후면 또 다음 출장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여성지위위원회 세션에 참여하는 일정이에요. 이번에는 일정을 마무리 한 후에 애인의 동생 가족이 사는 보스턴에 들러서 짧은 휴가를 보낼 계획이라 더더욱 여유가 있기는 하지만, 공백시간에 대한 쓸데없는 야심은 내려놓고 현지 일정에 최대한 충실하자는 결심만을 가지고 떠나보려고 합니다. 다음달에도 출장 후기(!)로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