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동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기획의 말 행성인의 오랜 회원인 여기동님이 필리핀에서 안부를 전합니다. 2015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남편의 나라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여기동 님은 딸 '인보'를 입양하여 육아일기를 쓰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연구들을 리서치하며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

행성인 회원님들께,
오늘은 우리 딸내미의 유치원 과제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학교에서 내준 숙제/프로젝트는 다름 아닌 가족사진을 이용하여 앨범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학에서 쓰이는 분수표가 세트로 따라왔더라고요. 쓰고 오리고 붙이고 그리고 색칠하고 야단법석이었답니다.
가족 앨범 만들기
첫 작업 단계에서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을 선별하여 프린터로 출력했습니다. 우선 겉표지는 단단한 것이 필요했는데 마침 예전에 아이가 그렸던 스케치북 표지를 버리지 않고 보관해 놓은 것이 있어서 이것을 재활용했어요. 앨범의 표지 사진은 뭐니 뭐니 해도 레인보우 깃발이 나온 사진으로 떡하니 걸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정이 퀴어한 가족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즉 레인보우 패밀리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지요.

이 대문 사진은 퀴어퍼레이드 참가했을때 사진 입니다. 찰스 아빠는 무지개 깃발을 목에 걸고 무지개맨이 되었습니다. 저는 모국의 퀴어퍼레이드에서 익힌 솜씨로(?) 피켓 두 장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평생 사는 동안, 아니 죽어서도 내릴 수 없는 ‘동성결혼’과 ‘레인보우 패밀리’ 피켓을 들었지요.
인보의 포스도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 틈새로 딸내미가 작은 무지개 깃발을 ‘앞으로 향하여’ 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작렬이지요. 예전에 한국 퀴어퍼레이드 포스터에 적힌 ‘작렬(灼裂)’이란 단어가 기억납니다. 작렬하라, 즉 퀴어의 꿈, 희망, 사랑 그리고 (동성애혐오를 불 질러버리는)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싶네요.
앨범 제목과 함께 저희 가족을 서술해 보았습니다. 우리 아이의 가슴에 새겨주고 싶은 문구이자 내가 세상에 외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LGBT Queer 패밀리이다.
나의 부모님은 동성결혼을 하셨다.
나를 많이 사랑해 주시는 게이커플 부모님이다.”
요즘에는 아이가 친구들에게 부모를 설명할 때가 중요하다 싶어 영문으로 설명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나의 엄마 아빠는 게이 커플이다 My daddy and mommy are a gay couple).
그리고 나의 엄마는 게이 엄마이다 (My mommy is Gay mommy)
게이 엄마는 남자이다(Gay mommy is a boy, not girl).
이런 설명이 지금은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점차 학년이 올라가면서 잘 이해하리라 믿습니다(딸내미야 절대로 졸아서는 안 돼요). 표지 마무리는 때마침 조안 이모가 선물로 준 입체형 열기구 풍선 스티커를 붙여서 둥둥 띄웠습니다.
행성인 여러분, 사진 속 풍선을 타고 저희 가족사진 함께 구경해 보아요.

새해를 맞이한 첫날 잔치 사진입니다. 찰스 아빠가 필리핀 스타일로 일 년 열두 달을 상징하는 열두 가지 과일과 여러 음식을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 놓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맛있게 먹어요.
바로 옆 사진은 자긍심의 달 6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제 사무실 발코니에 무지개 깃발을 걸어 놓고 한 컷 찍었지요. 사진을 붙이고 아이는 빈 공간에 엄마, 아빠, 인보 그리고 조안 이모까지 그려 넣더라고요.
다음 사진은 물놀이와 소풍 갔던 사진으로 엮었습니다.

아이가 생후 8개월 되었을 무렵인듯해요. 석양으로 노을이 물드는 해변 공원에 놀러 갔습니다 아이가 어려서 캥거루 아기띠에 메고 다녔네요.
이번 앨범 숙제가 어려웠던 점은 날씨별로 사진을 담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화창한 날씨, 흐린 날씨, 비 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등의 사진으로요. 아마도 아이들에게 제각기 다른 날씨를 알려주려고 내준 숙제 같습니다. 날씨별 범주에 맞춰 흐린 날과 밤 사진을 담았습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읍내 공원에 놀러 갔었지요. 아이 모습이 토실토실합니다. 옆의 야경은 지인의 어머니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 놀러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요때는 아이가 두 살이 정도 먹어서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제법 잘 걸을 때입니다.

이 사진은 시내 박물관에 다녀온 사진입니다. 저희가 살고 있는 두마게티 시티는 큰 도시에 속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립박물관이 있더라고요. 박물관에서 우리는 주로 오래된 토기와 동식물군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닌 성당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박물관 한편 바닥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독서 코너도 마련되어 있어서 책 구경도 하고 왔습니다. 마루 바닦에 익숙한 한국 문화식이라 좋았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필리핀 전통의 날 (Wikang Day) 행사의 사진입니다. 필리핀의 언어는 말레이폴리네시아어에 속합니다. 문자는 바이바인 (Baybain)이라는 고유 문자가 있었더라고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스페인 식민통치 시기에 고유 문자가 영어식 문자(알파벳으로 표기되는 라틴문자)로 대체되면서 고유 문자를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언어의 정체성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생각과 말을 표현하고 이를 타인과 상호교류하는 즉, 개인과 상호 간 의사소통에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라고 믿습니다(한국 사회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배 하에서도 한국어를 잃어버리지 않아 정말 다행이지요.)
이 전통 행사에서 여아들은 화려한 문양의 드레스를 입고 맨발에 샌들을 신습니다.
분수표

아이가 유치원 1년을 다니면서 숫자 1부터 20까지 겨우 세고 쓰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교과서에 분수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분수표 만들기가 숙제로 부과되었어요. 제가 경험이 없으니 인터넷과 유튜브의 도움을 받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밑 고정판은 시계처럼 원형을 만들어 8등분 했고 속에 각 분수가 드러나도록 끼워 넣었습니다. 속 판을 돌리면 분수의 크기가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궁금해서 학년별 교과과정을 찾아보니 분수는 초등학교 저학년(1학년이나 2학년) 정도에서 다뤄지더라고요(‘선행학습도 아니고 이건 너무 빠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과제라서 안해 갈 수도 없고 해서 일단 만들고 아이에게 숫자를 크게 읽는 정도로 가르쳐주었습니다.
과제의 난제
저는 아이의 과제를 준비하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합니다. 아이는 유치원에서 영어를 사용합니다. 아이의 발표를 위해 영어로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만드는 과정은 저랑 한국말을 하면서 만들지요. 아빠나 조안이모의 도움을 받을 때면 비사야어(필리핀 지방어)로 이야기를 합니다.
이번 분수표는 제가 만들어서 아이에게 영어로 설명하려니 너무 어려웠습니다. 사실 제가 가장 못하고 싫어하는 과목이 수학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수포카이지요. 어려서 아버지가 주산을 가르쳐 주어서 산수와 암산은 제법 잘했어요. 그러나 중학교 때부터 배우는 수학은 어려웠어요. 저의 뇌에는 수리-논리적 사고력(Logical-Mathematic Intelligence)이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아요(우리 딸내미의 수리 능력은 잘 발달하면 참 좋겠는데 말이죠).
또 하나의 난제는 과제물을 만들 때 아이가 어떤 것을 만들고 어디부터 협업을 하는가입니다. 일단 숙제를 보고 구상한 뒤에 이것을 결정합니다. 제가 다 만들고 아이가 공부하는 방식보다는 가능하면 오리고 붙이고 쓰고 그리는 것을 시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스스로 이 과제를 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지요.
순간순간 유혹이 밀려옵니다. 아이와 함께 하자니 ‘시간도 없는데 그냥 나 혼자 뚝딱뚝딱 만들면 훨씬 더 빨리 끝낼 수 있는데’라는 빨리빨리 병입니다. 그래서 들었던 생각이 부모님이 모두 직장생활로 바쁜 경우, 퇴근 후 아이의 숙제를 돕는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지와 행동을 좋아하는 저는 이렇게 마음을 먹기로 했습니다. ‘그래 아이의 과제를 통해 하나씩 배워 나간다. 그리고 다시는 오지 않을 아이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을 즐겨야지, 암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라고요.
요 녀석 예전보다 훨씬 더 그리고 오리고 붙이는 것을 아주 좋아라 합니다. 시간만 나면 빈 종이에 사람과 사물을 열심히 그려댑니다.
모국의 봄이 그립습니다
이제 모국은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이네요.
개나리, 진달래와 철쭉 그리고 목련꽃이 보고 싶습니다.
이곳 필리핀은 가장 더운 여름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마음의 꽃 활짝 피는 봄 맞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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