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웅(행성인 미디어 TF)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1월은 10월까지 쉼없이 이어진 바쁜 일정들을 마무리하고 연말을 준비하는 한 달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11월 20일 트랜스추모의날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떠난 동료들이 당장 지근거리에 있고, 이들을 공적으로 추모하고 기억하기 위한 행사들은 설령 해외에서 들여온 기념일이지만 저마다 삶에 밀착시킬 여지가 충분했지요.
아니, 이미 우리는 연결되어 있음을 공적으로 선언하고 실천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하여 동료의 기일을 챙기고 경사를 챙기며 급기야 해외에서 정한 온갖 정체성과 애도와 차별반대의 날들을 챙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퀴어퍼레이드를 명절이라 부르며 내내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퀴어로서 스스로를 드러내며 광장에 나와 몸을 과시하고 과시한 몸들이 거리를 점하는 날은 일년에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서울에서 대구로, 온갖 지역의 행진으로 연결되면서 즐길 수 있는 명절은 더 많아졌습니다. 여기에 기념일들이 월마다 배치되면서 매달 명절을 맞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명절과 이벤트로 가득한 일상은 일상을 온전히 누리기 어려운 상황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합니다. 축제와 행진을 기어이 만들고 꾸역꾸역 꾸미고 밖으로 나와야 성이 찬다는 것은, 그만큼 평상시 참고 숨기며 벼르고 벼르다 터뜨리는 퀴어의 시간은 아닌가 말입니다. 달력을 채우고 달마다 날짜마다 이제 성긴 연결을 갖게 되지만, 그렇다고 퀴어로서의 온전한 일상이 따라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엉뚱하지만 위족류 생물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이 지금의 발전에 이르기 전에, 사람들은 위족류 생물에 대해 속이 비어 있고 겉의 막으로만 구성된 생물로 인식했다고 합니다. 속은 비어 있되 표면이 가짜 발이 되어 여기저기 옮겨다니고 가짜 발들로 다른 생물을 포위하여 잡아먹는다는 것이죠. 이 위족류 생물처럼 껍데기만 있어도 달력을 채우고 우리의 시간을 이어낼 수 있다면 어떠한가 말입니다. (물론 위족류는 껍데기만 있지는 않습니다. 실제로는 많은 핵을 가지고 있고, 무성생식을 합니다. 알고 나니 오히려 더 가까운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11월은 트랜스추모의날 외에도 HIV감염인 인권주간이 시작되는 달이기도 합니다. 12월 1일 세계 에이즈의 날이면 에이즈운동과 성소수자 운동들은 밖에 나와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을 낭독하고, 공동의 행사와 집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는 인권주간의 볼륨을 키워 장장 3주 가까이 걸쳐 단체마다 크고 작은 행사를 준비합니다. 올해는 11월 10일 헌법재판소에서 진행한 전파매개행위죄 공개변론 전후부터 우리에게는 명절이 시작된 것인지 모릅니다. 트랜스 추모주간 또한 최근 미성년 자녀를 둔 부모의 성별정정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후부터 이어져온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깥에서는 그저 법률 싸움처럼 보이겠지만,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추모하고 살아있음을 기억하며 함께 연결되어 온전한 일상을 확보하길 바라고 요구하는 행동들이 모이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명절이 아닐 이유는 없겠죠. 우리의 시간이 달력놀음으로만 남지는 않는 것일 테고요.
11월 웹진은 모처럼 행성인 활동팀의 팀원들이 소중한 글들을 남겼습니다. 이 사소한 연결들이 단체 활동의 주춧돌임을 기억합니다. 비틀거릴지라도 무너지지 않도록 곁이 되기를.
[회원에세이] 12월 1일 HIV 감염인 인권의 날을 맞아 : 행성인과 함께한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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