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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과월호

행성인 웹진 2022년 10월호_ 발행 연기의 변

by 행성인 2022. 10. 29.

 

 

남웅(행성인  미디어TF)

 

 

편의적 판단을 피하기 위해

 

10월호 웹진을 발행하기에 앞서 여러분의 안부부터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들 괜찮으신가요. 주말을 지나며 많은 글과 뉴스가 올라왔습니다. 지금의 기분을 정리하기 위해, 그것을 사사로운 메모로 남기지 않기 위해 말을 고르게 됩니다. 막막한 무력함에서 슬픔으로 이어지는 감정은 당국에 대한 분노로 옮겨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엇에 분노하고 슬퍼할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피할 수 없습니다.

 

참사를 해결하고 성찰하는 시간은 지난합니다. 사고가 일어난 현장에서 어떤 복잡하고 우연적 상황들이 개입하는지, 어떤 안전장치가 누락 되었는지 묻고 듣는 노력은 더디고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사건을 빠르게 해결하고 싶다면 논리를 단순히 만드는 것이 좀 더 용이할 것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든 집단 이슈든 사고가 생기면 여론은 사고 당사자에게 특정 장소에 있거나 행위 한 것을 탓하거나 책임을 묻습니다. 당신이 여기 오지 않았다면, 그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예고라도 했다면…그렇게 손쉬운 해결방식은 사회적 통념에 의존하기 쉽습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이 특정 집단을 분리하면서 통념을 더 강화한다는 점입니다. 책임의 무게가 향하는 대상에는 줄곧 위계의 꼬리표가 따라붙습니다. 어리다고, 가난하다고, 성소수자거나 장애와 질병이 있다고, 남성이 아니거나 국적과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지하고 문란하며 부주의하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이 따릅니다.

 

핼러윈 참사를 둘러싼 비난을 접하며 기시감이 일었습니다. 지난 코로나19 당시 이태원 게이클럽이 표적될 때, 언론들은 이 시국에 굳이 게이 클럽을 가고 찜방을 가야 했냐고 비난하며 여론을 선동했죠. 세월호 참사 때도 유족들을 향한 조롱과 비난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유가족이 참여해 특별법 제정 서명을 받았던 퀴어퍼레이드에 혐오세력들은 ‘세월호 추모주간에 무슨 축제냐’고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당신이 자처한 일이라는 주장과 나의 일상까지 방해하며 행동해야겠느냐는 냉담함은 국가의 보상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갈래를 만듭니다. 어떤 경우든 사건의 희생자들은 사회적 규준과 질서를 습득하는 계몽의 대상으로 평가되거나 심지어는 가해자 취급까지 받게 됩니다.

 

 

애도, 폭력

 

핼러윈 참사 이후 대통령은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습니다. 처음에는 참담한 사고에 국가적 애도가 당연하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만, 어떤 방식으로 문제를 대하고 책임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붙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은 예년보다 적은 인원을 배치한 과실을 반성하기보다 사건 이후 기록영상들을 돌려 누가 밀었고 밀라고 외쳤는가를 조사합니다. 마약 단속을 위해 경찰을 배치한 자리에 안전 관리를 담당한 이들은 없었다고 합니다. 이는  참사 직후 참가자들이 약물에 취해 사고가 일어났다는 비난 프레임을 만든 논리와 멀지 않습니다. 참사 직후 대응당국들은 참사 대신 '사고'를, 희생자 대신 '사망자'로 쓰고 근조(謹弔)가 적히지 않은 리본을 굳이 찾아 달도록 지시합니다. 경찰청은 시민단체와 언론, 여론동향을 수집하고 정리한 내부 문건을 작성했다고 하죠. 행정안전부장관은 사고가 날 만큼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은 아니었다고 하며 경찰을 충분히 배치하지 않은 데 대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경찰신고 녹취기록이 나오고 비판이 높아지기 전까지는 반성도 사과도 없었던 이들이 지금은 약속이나 한 듯 줄줄이 사과행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번 참사는 국가가 일상의 안전에 손 놓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줬습니다. 참사 직후 이들은 어떤 대응을 하고 있던가요? 참사를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은 참사 직후 애도기간동안 출근길문답(도어스테핑)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국회 또한 애도를 이유삼으며 현안보고에 대한 질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애도를 해야겠으니 어떤 문제제기도 반성도 하지 않은채 문부터 닫아 걸겠다는 심산일까요. 일선에서 안전을 책임져야 했던 용산구청은 올해 말까지 관내 행사와 단체활동을 중단한다고 말합니다. 참사를 막기 위해 행사를 막는다는 경악할 논리 속에 중단을 강요하는 대상에는 애도를 표시하는 공연과 행사들도 해당합니다. 행정당국이 행사를 자제한다는 것은 단지 행정적 낭비를 줄이겠다는 것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적 애도를 명목으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애도를 가로막겠다고 엄포놓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참사가 가져온 슬픔에 일상을 멈추고 추모하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당국이 일선에서 가져야 하는 태도는 형식적 슬픔에 앞서 늦게라도 책임 있게 반성하고 책임을 다하는 일입니다. 추모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만을 부리고 추모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강제하는 것은 분명 애도를 명분 삼은 폭력입니다. 국가애도기간이라는 명분으로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즐기는 행위를 통제하는 방침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행하는 슬픔과 애도를 국가가 일괄적으로 탈취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여기서 나아가 누군가는 ‘애도의 계엄’을 말했죠. 국가는 애도를 빌어 안전을 방기한 책임을 정작 통제의 명분으로 삼고, 군중의 존재를 ‘문란함'으로 낙인찍어 통제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애도를 명목삼아 빗장을 걸어버린 이들은 국민의 감시를 피해 어떤 작당모의를 하고 있을까요. 이미 선연하게 벌어진 재난상황에도 일상에 있어야만 했던 안전 보장의 시스템 부재를 체감하는 시절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한번 더 참담하게 만듭니다. 현장 신고를 무시하고 사후 대응이 필요한 시점에도 꼬리자르기와 책임 전가에 급급한 이들의 책임은 엄중하게 심문받아야 합니다.

 

 

애도의 공동체

 

우리에게 익숙한 핼러윈은 켈트족 전통에 기원을 두지만, 사람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연결했던 일 년의 하루를 대중적으로 전유하며 즐깁니다. 기성세대에게는 낯설지라도 누군가는 유치원과 학교에서 즐겨왔고 여느 때보다 즐거운 계획들을 세우며 자신을 꾸미고 사람을 만나는 명절같은 날입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와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즐기는 자리는 여느 축제들과 조금 다른 온도와 형태를 갖습니다. 설령 그것이 전통도 뭣도 없이 소비적으로 이어져온 행사라 할지라도 말이죠. 특히 이태원에서의 핼러윈은 지리적 성격만큼 많은 퀴어와 이주민, 청소년을 비롯한 다양한 이들이 한데 나와 전환과 경계를 넘는 표현들을 시도하고 공유하는 점에 여느 지역과는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고 곁에서 슬퍼하면서 한자리에 모인 이들은 특정 집단으로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전전긍긍하며 밤을 샜을 많은 이들이 참사 소식에 잠 못 이룬 토요일을 보내고 바로 아침을 맞으며 손에 잡히는 대로 지인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직장과 학교 동료뿐 아니라 주변에 손이 닿을 수 있는 사람들과 그들의 지인들에게도 생사를 확인했습니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 국적과 나이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충격과 슬픔, 생존을 확인해야 하는 갈급을 나눈 이들을 느슨하게나마 공동체라고 묶을 수 있다면, 이 공동체는 특정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라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핼러윈이 지나고 얼마 뒤인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입니다. 매년 이날 즈음이면 이태원광장에 트랜스젠더 동료들을 기억하고 자신들의 존재들을 드러내는 이들이 모여 거리를 행진했지요. 올해부터 행진은 이전과 다른 의미와 과제를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이태원에 언제고 다시 모일 우리는 트랜스젠더를 추모하는 이날 참담하게 곁을 떠난 희생자들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추모의 연대가 과제로 남은 것 같습니다. 이는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구분하여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구도를 넘어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력함을 조장하는 부당함에 맞서기 위한 애도의 실천

 

사람들은 한데 모여 유흥을 즐기고 때론 부당한 처우와 희생에 함께 분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이 지천에 있습니다. 자극적인 표현으로만 사고를 설명하는 바이럴 게시물은 때로 대중을 무능한 관객으로 만듭니다. 이는 사람들이 모여 즐기는 것 자체를 통제하고 스스로를 검열하고 자책하게 합니다. 참사 현장 주변에서 축제를 즐기던 이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주변에 누군가 사경을 헤매고 숨이 멈추는데도 구하기는커녕 사고를 인지하지 못하고 즐기기만 한데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호소합니다.

 

많은 이들은 현장에 참여한 이들의 태도가 부주의했다고 비난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참사에도 아랑곳않고 파티에 취해 있다며 비난을 전가하는가 하면, 지금의 참사가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지금의 국가적 애도기간에 반기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만남과 놀이가 사고를 유발한다는 식의 비난으로 점철된다면, 우리가 그동안 기쁨을 추구하며 시도해온 만남과 행동의 맥락과 당위는 통째로 부정당할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논쟁적이고 파괴적인 유흥이라고 가치절하되고 비난받을지라도, 나와 당신을 비롯한 참여자들이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면, 여기에는 행위 자체에 가치를 판단하기에 앞서 만남에 참여하기까지 어떤 맥락과 의미가 있는지 살피고,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구비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것이 참여하는 이들 뿐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방향입니다.

 

자신들이 향유하는 유흥과 쾌락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될 때, 하지만 그 유흥의 이벤트가 문화로서 담론의 근력을 갖지 않고 있다면 비난과 낙인 앞에 자신의 즐거움과 기쁨을 설명하는 일은 더 어려워집니다. 내가 즐기는 행위의 경험들을 모으고, 나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는 이들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사회에 요구하는 일은, 적어도 내가 향유하고 즐기는 것들이 무력하게 부정당하지 않으면서도 그 즐거움에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변화를 도모하는 노력의 시작입니다. 나의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가할지 모를 위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드는데 노력하고, 안전의 감수성을 높이고 서로를 지키며, 이 상황들을 기억하며  당국의 무책임을 묻고 안전과 평등에 대한 제도화와 교육을 요구하는 과제를 통해 우리는 공동체를 고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애도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온 이들이 떠난 이를 통해 삶의 조각들을 맞춰가는 이상한 만남의 경험을 만듭니다. 선동적이고 말초적이며 과잉된 언어를 걷어내면서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끝까지 질문합시다. 현장의 상황을 다시 읽고, 슬픔 속에서도 만남의 방식을 찾고 일상과 기억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것이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실천일 것입니다. 통제에 항의하며 당신과 나눴던 일상의 존엄을 찾아가는 것 또한 애도에서 멀지 않습니다. 떠난 이들을, 동료와 가족을 잃은 슬픔을, 그들을 구하려는 노력들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현장을 기억하기 위한 언어들을 발굴하고 만들어냅시다. 참담한 사고가 사사로운 소란으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 조심성 없는 이들이라는 부당한 낙인에 저항하기 위해 어떤 안전과 책임이 누락 되었는지, 누가 그 책임을 방기하고 있는지 좌시하지 않는 것 또한 지금을 살며 참사를 접하는 이들의 책임일 것입니다. 애도를 구실삼아 책임에 대한 사과도 반성도 없이 희생자 가족과 시민에게 재차 상처 입히는 정부와 지자체에 문제제기하면서도 서로의 아픔을 돌봅시다. 치료와 치유를 지원하는데 어떤 차별과 위계가 생기지 않는지 경계합시다. 

 

애도는 한번에 끝나지 않을 것이고 정돈되지 않은 감정들을 추스리는 과정은 많이 흔들리고 비틀거릴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일상을 일구며 무책임한 권력에 날선 물음표들을, 안전과 돌봄을 위한 불온한 애도의 리스트를 계속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2022. 11.

 

 

 

 

행성인 10월 활동스케치

 

[발제문] 일터의 성소수자들, ‘나’답게 일할 권리를 말하다 - 성소수자 노동자 집담회 결과를 중심으로 알아본 성소수자 노동자들의 일터 경험과 ‘드러내기’ 욕구

 

[토론문] 성소수자 노동자의 직장내 괴롭힘 대응 사례와 노동조합의 역할

 

[퀴어X투쟁] 청소 (노동자) 가 만만하냐 - 세브란스 청소 노동자의 손을 잡으며

 

[회원 에세이] 퀴어에게 운동이란

 

[회원 에세이] 행성인의 문을 연 낯선 사람

 

육아#7. 소풍 이야기: 꼬까옷 입고 나들이 가요